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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사로운영화리스트] 아워 바디 (한가람, 2019) / 듀본인 정보
    카테고리 없음 2020. 2. 20. 01:17

    올해도 10편의 영화를 택했지만 아쉽게도 빈 데가 있다. 예를 들어 <벌새>는 <나쁘다>에 올해 최고의 영화중 하나인 <나쁘다>였다. 그러나 부산영화제에서 먼저 본 다른 필자들이 이미 작년에 리스트에 올라 있어 올해 리스트에서는 빠질 수밖에 없었다. 몇몇 필자의 올해 리스트에는 여전히 이 영화가 있어! 아, 모두 무시하고 보테요쯔 괜찮은 것 같다.)더욱 안타까운 영화는< 불타는 여성의 초상>(세사아마, 2019)이다. 영상 자료원이 준 거짓 없이 거짓 없이 거짓 없이 최종 마감 1이 11월 81. 프라이드 영화제에서 내가 이 영화를 본 적은 11월 91. 어쩔 수 있나프지앙어. 보지 못한 영화를 미리 리스트에 올릴 수는 없다.언제나 '쁘띠쁘띠'처럼 리스트에 올라 있는 영화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를 풀어나가 보자. 1단, 올해는 한정 영화를 많이 넣었다. <우리집>, <아워바디>, <벌새>(!)는 올해 극장에서 개봉한 영화 중 가장 내 뇌 속에 오래 남은 영화다. 봉준호의<기생충>은 2019년에 나쁘지 않아서 온 영화 중에 가장 흉악하게 재미 있는 작품 1것이다. 사악한 즐거움은 <더 페이보릿>도 만만치 않다. 개인사를 냉전시대의 역사로 보급한 짓궂은 영화 콜드워도 있다. 리미티드 시리즈인 믿을 수 없는 이야기와 체르노빌은 영화와는 다른, 텔레비전 미디어 고유의 스토리텔링이 지닌 힘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경계선>, <어스>, <미드소마>는 판타지와 공포영역에 속하지만 여기에는 내 취향이 반영되어 있기도 하지만, 우리는 이 영역의 영화들이 슬슬 게토에서 벗어나 평온하고 진지한 목소리소음으로 인정받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아워 보디>(한가람, 2019)이야기를 한다. 이 영화가 나쁘지는 않아에 올해 최고의 영화였을까. 아니다. 하지만 가장 즐겁게 스토리를 할 수 있었고, 그 반응을 나중에 보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고 재미있었다. 굉장히 짓궂은 재미를 방사능처럼 발산하는 영화다. 여후하지만 올해 내가 재미있게 본 영화들은 대부분 짓궂은 표정의 여자를 한 명 이상 품고 있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자영도 예외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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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정만 놓고 보면 건전하기 짝이 없다. 자포자기 상태로 시험을 포기한 8년차 행정고시생인 자영은 어느 날 마을에서 달리기를 하는 현주라는 여자를 만난다. 현주의 모습에 매료된 자영은 뛰기 시작하고 현주의 친구가 된다. 자영은 서서히 건강을 되찾고, 프렌드가 소개해 준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인턴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점점 더 처음이고 능력을 인정받으면 정규직이 될 가능성이 열린다.이 정도면 거의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낡은 격언을 바탕으로 한 생활운동 홍보영화처럼 보인다. 자영과 현주의 관계는 로맨스의 전망을 암시하기도 하지만 이 또한 건전해 보인다. 운동을 하면 건강도 얻고 사랑도 얻고 취직도 할 수 있다니 이처럼 노골적인 선전물이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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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영화는 그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 사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도 원래 그런 얘기가 아니었다. 유베날리스가 쓴 줄거리는 겨우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까지 깃들기를 기도하라는 정도였다. 육체의 건강이나 질병은 확실히 정신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건강한 몸의 영향이 건전한 방향으로 갈지 누가 확신할 수 있을까. 육체가 정신의 건전함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군인과 검투사 자부라에 살던 풍자 시인이 설마 그 자명한 사실을 몰랐을까.<아워바디>는 유베날리스의 회의적인 견해에 충실히 따른다. 영화는 자영에 건강한 몸을 준다. 하지만 8년 고시생활 중에 피폐해진 정신까지 치료하지 않는다. 이 일그러진 정신이 운동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에너지를 얻으면 어떻게 될까.슬슬 <위험한 독신녀>의 시자신리오가 떠오른다. 토론토에서 이 영화가 상영됐을 때 몇몇 평론가가 이 2개의 영화를 비교했다. 다행히 자영은 그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 뒤틀림을 잘 못해서가 아니라 뒤틀림의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이 얘기가 더 자신 있는 방향으로 가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지만 자영이 현주의 몸에 조금이라도 상처를 주는 것은 여전히 상상하기 어렵다.<아워 바디>는 현주, 줄거리 하면 현주의 몸에 대한 자영의 욕망에 대한 영화였다.다만 그 욕망이 무슨 뜻인지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는 데 이 영화가 재미있다. 자영과 현주는 당연히 모르고, 관객도 모르고, 그들의 창조주인 한가람도 확신하지 못하는 것 같다.이해와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흐름은 있다. 아워바디가 건강한 영화였다면 자영과 현주는 섹스를 했을 것이다. 적어도 영화의 구조를 보면 둘이 만자 그는 순간부터 그것이 유 1 하게 자연스럽고 당연한 결론이라는 생각이 금할 수 없다. 그 때문에<아워 보디>의 드라마는 영화가 이 당연하기 그지없는 지점에 가는 길에 끊임없이 1마스크 하는 잘못된 방향으로 질주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이따금 이렇게 됐을까. 가장 큰 이유는 아마 자영이가 이성애자여서 자신이 이성애자라는 것이다. 자영은 현주의 몸에 집요하게 집착하지만 이를 성애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이를 부러움과 정의하고(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1에서)현주를 모방하려는 시도까지는 정상이었다 이것은 얼마든지 건강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그 길로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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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중반에 현주가 교통사여서 세상을 떠나고 자영은 죄의식에 휩싸인다. 이 죽음이 자살인지 사건인지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자영에 건강하지 못한 죄의식을 재고하기에 충분하다. 자영은 현주에게 드물게 다가온 여성 동맹이었다. 현주는 눈치 보지 않고 한동안 러닝머신만 달렸던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외모가 아닌 내면을 읽어주길 바랐던 사람이었다. 그런 만큼 오랜만에 만든 여맹이 가장 최근까지 만난 어떤 남자보다 자신의 몸과 외모에만 집착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아워바디>가 둘이 나쁘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는 섹스와 로맨스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이 또한 건강한 진행이 가능했다. 아름다운 몸에 대한 사랑 자체가 나쁘지 않고 나쁘지는 않은 것 아닌가. 두 사람이 이성의 유아에서도 상대와 자신의 몸을 사랑하고 함께 가 좋은 어떤 길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이 영화에는 없다. <아워바디>의 작은 세상으로 이선유어는 모두 건강한 전개를 막는다. 하긴, 올해 본 영화 중 가장 튼튼하고 건강한 섹스를 나쁘지는 않은, 눈사람이 <타오르는 여성의 초상>의 마리안과 엘로이즈라는 게 의견이다.<아워바디>에 대한 반응 중 가장 재미있는 것은 이 작품의 섹스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도 된다는 점이었다. 적어도 자영이 살아있는 다른 사람과 나쁘지 않고 드러눕는 섹스는 매력적인 곳이 하나도 아름답지 않아도 대부분 불쾌하다. 남자와 헤어지기 전에 나쁘지 않은 마지막 섹스는 비열하기 짝이 없다. 현주의 대나무 sound, 이 강을 달리는 모임의 남자와 어떤 섹스는 남자의 자기도취와 그에 전혀 반응하지 않는 자영 때문에 공허하다. 직장 상사의 중년 남성과 나쁘지 않은 눈 섹스는 글 자체가 불쾌한 이유를 담고 있다. <아워 바디>를 싫어하는 몇몇 관객은 이 영화를 "중년남자와 섹스하는 영화"라고 부른다. 마치 젊은 여자가 중년 남성과 하는 섹스가 한국 영화에서는 흔치 않은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면 마지막 섹스로 영화가 얼마나 아름답지 않고 불쾌한지 인식시키는 의외의 목표를 달성한 셈이다.관객들이 이 영화의 섹스 신을 싫어하는 이유는 동성 유아 기반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이성 유아 기반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자영과 현주의 관계에만 의의가 있다고 말하는 관객들은 이성유아 섹스는 지겨웠다고 하지만, 더 많은 관객은 영화가 그리는 모든 이성유아 섹스의 환멸에 찬 묘사가 더 신경 쓰느냐는 것보다 숨이 막힌다. 주인공은 자신이 이성유아라고 믿지만 이성유아에게는 답이 없다. 그리고 다들 기겁을 하는 마지막 섹스는 가장 동성유아에 가까운 섹스였다. 자영이 현주의 것이라는 욕망을 대신 실천했으니. 이를 통해 자영과 현주는 한 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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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연히 현주가 자영에게 한 말이 사실이라는 증거는 자신감도 없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자영은 현주의 내면에 대해 전혀 모른다. 현주가 이성애자인지도, 자영에게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자영이 모두 sound 늦게 참회하고 스스로 재구성한 현주는 몇 가지 의미 없는 단서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허구에 불과하다. 자영도 이를 모르는 바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상식의 브레이크는 걸리지 않는다. 아, 할 수 없지. 우리몸과정신이모두sound섞여만들어내는욕망은절대완전히수긍할수있는존재가아닙니다한마디로 <아워바디>는 심술궂다. 가끔 심술궂게 굴지 않는 <기생충>을 능가한다. " 믿음직한 "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모든 교훈은 파괴되고 두.와 관객의 욕망은 그저 자신도 실현되지 않았고, 그들이 가는 어떤 길은 최악의 형태로 뒤틀리고 있다. 정말 못생긴 화자가 킥킥 웃으며 만든 것 같은 영화다. 이러한 말들이 대부분 그렇듯, <아워바디>는 우리가 전에는 전혀 의견도 못했지만, 아내 sound로부터 존재할 수밖에 없는 욕망의 사각을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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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k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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